제10장
“엄마?” 유리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표정을 순식간에 평소대로 되돌리더니 두 팔을 벌려 최아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엄마, 안아 줘.”
“네 엄마라고?” 이도준은 반신반의하며 유리를 내려다본 뒤 최아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신분을 의심받자 최아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허리를 꼿꼿이 펴고 쏘아붙였다. “이봐요, 아저씨. 지금 제 아이를 붙들고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이도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품 안에서 서럽게 우는 아이를 보며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됐고요.” 최아라는 진지한 얼굴로 아이를 자기 품에 안았다. “유리야, 울지 마. 가자.”
최아라는 유리를 안고 등을 곧게 편 채 한 걸음 한 걸음 위풍당당하게 걸어갔다.
모퉁이에 다다르자 최아라는 벽에 몸을 확 기댔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방금 자신이 이도준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나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목숨은 붙어 있었다.
정말로 두 모녀를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었다.
“이모, 괜찮아요?”
“안 괜찮아. 너희 모녀 때문에 이모가 아주 속이 타들어 간다. 방금 네 아빠 눈빛 봤어?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이모, 방금 진짜 잘했어요.” 박시후가 어디선가 나타나 두 사람 앞에 섰다.
시후는 계속 근처에 있었다. 다만 박희수가 이도준이 있으면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피하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오빠, 유리 임무 완수했어. 나 정말 대단하지?”
“응, 우리 유리 대단해.”
“그런데 엄마 주변에 감시하는 사람이 있어서 엄마를 데리고 도망칠 수가 없었어. 오빠, 이모, 엄마가 너무 위험하니까 우리 먼저 떠나래.”
최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위험해. 방금 네 아빠가 벌써 의심하기 시작한 것 같던데. 너희 둘까지 얼굴 비쳤다간 네 아빠가 눈치채는 순간 끝장이야.”
두 아이 모두 얼굴이 워낙 반듯한 데다 유리는 박희수를, 시후는 이도준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우리 먼저 가자. 엄마한테 휴대폰 있으니까 그걸로 연락하면 돼. 우리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자.” 시후가 말했다.
“그래.”
유리가 최아라의 손에 이끌려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을 본 박희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아라가 제때 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윤명주의 서러운 울음소리만 남았다.
“도준 씨, 저 정말 그 아이 밀지 않았어요. 왜 다들 저만 나쁘게 보는 거죠? 전 그냥 그 아이랑 잘 얘기해 보려고 했을 뿐이에요.” 윤명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억울해했다.
“윤명주 씨, 자해 공갈 실력이 아주 수준급이시네요. 뭐, 막상 자기가 당하니까 못 견디겠어요?” 박희수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니에요.” 윤명주는 잡아뗐다. 그러고는 되레 박희수를 물고 늘어졌다. “박희수 씨는 왜 그렇게 저를 모함하세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모함? 네, 윤명주 씨 눈에는 온 세상 사람이 다 당신을 모함하고 당신만 옳은 거겠죠.”
“너!”
“틀린 말 했나요?”
박희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윤명주 씨, 그만 우는 게 어때요? 어린애 하나 붙잡고 그러는 거, 꼴사납지 않아요? 그렇죠, 이 대표님? 대표님도 참 꼴불견이시네요.”
이도준의 얼굴이 흉흉하게 굳었다. 박희수는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리며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 모습은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화나? 화내 봐!
네가 화날수록 난 더 즐거우니까!
결국 박희수는 또다시 이도준에게 손목을 붙들려 병원을 빠져나왔다.
“미친놈아, 이거 놔! 질척거리지 마. 나랑 상관없는 사이잖아. 나 혼자 갈 수 있어.”
“타.” 이도준이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박희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도준을 노려봤다. 실랑이할 기운도 없어 뒷좌석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몸을 던졌다.
“내가 네 기사야?”
“?”
“앞에 타.”
이 인간은 왜 이렇게 까다로운 거야? 차 타는 것까지 자기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나?
박희수는 정말이지 그를 한 방에 걷어차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배짱은 없었다.
박희수는 뒷좌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리고 ‘쾅’ 소리가 나게 문을 세게 닫았다.
그 소리에 옆에 서 있던 윤정마저 차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윤명주가 뒤에서 조심스럽게 걸어 나와 이도준의 곁에 섰다. 그녀의 눈에는 이도준을 향한 다정함과 수줍음이 가득했다. “도준 씨, 그럼 전 어디에 타요?”
이도준의 조수석을 저 쌍년이 차지해 버렸다.
“윤정 씨 차에 타. 쟤 머리가 좀 이상해서 말이 거치니까, 또 너 괴롭힐라.”
“이도준, 너야말로 머리가 이상하거든!” 차 안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도준의 표정이 보기 좋지 않게 변했다. 윤명주는 속으로 분했지만 이도준과 박희수가 대립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어쩌면 둘을 같이 놔두면 더 심하게 싸워서 이도준이 박희수를 더 혐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바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윤명주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순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윤정의 차에 올라탔다.
차 안에서 이도준은 한 손을 창틀에 걸친 채 다른 한 손으로 무심하게 운전했다. 차가운 바깥바람이 쌩쌩 불어 들어와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한기를 더했다.
차 안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박희수는 차가 해안 빌라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그가 또 자신을 그곳에 가두려는 것인지 생각했다.
싫어!
박희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부감이 차올랐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도준, 대체 어떻게 해야 날 놔줄 건데?”
